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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코스모스 요약

[북코스모스]다정함이 인격이다-김선희

by 맨땅부자 2025. 4. 2.

김선희 지음

나무생각 / 2025년 2월 / 312쪽 / 19,800원

▣ 저자 김선희

한국임상심리학회 공인 임상심리전문가이자 보건복지부 공인 1급 정신건강임상심리사. 부부심리치료 분야에 전념하여 부부와 가족관계 전문 임상가로 내담자와 함께해왔다. ‘김선희부부상담센터’를 개소하여 수천 쌍의 부부가 성숙한 사랑을 성취하도록 평생 헌신해 왔다. 연세대학교 학사, 석사를 거쳐 동 대학원 임상심리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연세대학교와 한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편하게 지내는 법》, 《내 남자 안아주기》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현대사회의 부정적 단면에는 갈등의 심화가 있다. 한국 사람 특유의 ‘정’을 거론하면 거리낌 없이 경시당한다. 나 혼자 살아내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 챙길 여유가 어디 있냐며 되레 성화다. 다른 사람을 보살피고 그들의 형편을 이해할 여유, 다정함이 실종되고, 나의 입장이나 권리를 외치다 보니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 가족 관계에서도 그러할진대, 대문 밖 타인을 살피는 성숙한 마음가짐, 그들을 향한 인격적 대우가 가능할까.

임상심리전문가로서 34년 동안 현장에서 수많은 내담자를 상담하며 인간 본성을 깊게 들여다본 저자는 개인의 관계, 가족과 가정을 넘어 사회에 만연한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갈등의 원인과 형태를 분석하고, 갈등 해결이 요원한 우리 사회에 ‘다정함’이 시급하게 처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다정함의 본질은, 상대가 자신의 취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녀린 인간임을 이해하고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아픈 만큼 상대도 아프고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보듬어주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 갈등을 해결하고 나와 너, 우리가 결속해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다질 때 우리는 연합군이 되며, 수시로 불어닥치는 위기와 역경, 고난과 고통을 성장의 부름켜 삼아 인격적으로 살아낼 수 있다고 저자는 담대히 전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정함을 ‘사람으로서의 품격’, 곧 ‘인격’으로 정의한다. 마음과 마음을 잇고 인간과 인간을 잇는 결속의 이해와 실천은 우리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품격이자 인격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한 다정함의 방향이 외부로 향하는 것도 중요하나 먼저 상처받기 쉽고 미처 보살피지 못한 자신의 내면으로 향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지치고 피로한 나, 타인의 폭언과 무심한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깨진 나, 위기 앞에서 잔뜩 움츠리고 불안에 떠는 나… 소중히 돌보고 관리해야 할 자신을 외면하고 우리 스스로를 차갑게 방치하지 않았나 돌아보자고 다정히 제안한다. 스스로에게 지금껏 수고 많았다고, 추스르고 다시 시작해 보자고 용기 내어 말해주는 것이 진정한 다정함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곧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다움을 향해 가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저자는 나와 다른 타인을 수용하는 방법들을 세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첫 단추는 상대의 연약함과 취약성을 끌어안는 다정함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너와 내가 다름을 분명히 인지하고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로 상대를 품을 수 있다. 나 개인에서부터 가족 간, 나아가 사회 안에서 서로가 연결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다정함’의 실천이다. 이 실천이야말로 우리 눈앞에 도래한 ‘마음의 시대’를 살아가는 참된 길이며, 역경을 소화해 내는 품위 있는 태도의 근간이다.

다정함은 섬세하지만 단순하기도 하다. 일례로 “내가 있잖아.”라는 말 자체는 대단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평이해서 굳이 말하지 않고 건너뛰어도 알 것이라 여기는 이도 많다. 그러나 평이하고 단순한 이 말의 효과를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말 하나로 누군가의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고, 크게 위로받는다. 이 말 하나로 파괴될 뻔하던 한 가정이, 갈등과 분열로 휘청거리는 이 사회가 서로 연합하고 회복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 차례

들어가며

1장 마음이 깨진 당신에게

왜 그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할까 / 지치고 피로한 나를 먼저 살필 것 / 마음이 깨졌을 때

행복을 추앙하지 말 것 / 걱정과 사랑을 혼동할 때 / 자존감의 덫 / 자기 수용과 저공비행

손상을 회복하려는 시도 / 외도, 그 트라우마 / 희생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감정이 과잉일 때 / 폭력, 그 치명성 / 텅 빈 내면의 소리 / 넋두리와 하소연

남 탓의 늪 / 완벽한 문제 해결은 없다

2장 다름을 수용하는 새로운 방식

상대방을 몰아붙이지 말 것 / 비판을 녹여내는 심리적 용광로 / 자기 확신이 도를 넘을 때

원망의 심리학 / 치명적 붕괴를 가져오는 사소한 일 / 연약함과 취약성 끌어안기

우울한 현실주의, 나쁘지 않아 / 상자에서 나오기 / 현실을 받아들이다

부부, 두 사람의 대서사 / 성격 차이 넘어서는 법 / 상대의 서운함 / 싸움의 자리를 옥토로

갈등을 극복하는 능력 / 자녀, 성인이 되다 / 자녀가 선을 긋는다면

위기는 일찍 만나 수습할 것 / 낡은 나 떠나보내기

3장 다정이 필요한 매 순간

내가 나를 도울 수 없을 때 / 인간은 언제 변하는가 / 선을 지키는 사랑

고통을 해석하는 능력 / 나 원래 그래요 / 사랑의 반대말 / 헤아리고 덜어주는 관계

부부간 돌봄의 실체 / 인간 본성의 이해 / 다정함의 근원이자 필요조건

한 땀씩 꿰어지는 친밀함 / 일상을 나누는 대화

4장 결국 상처는 아문다

마음의 환부를 치료하는 눈물 / 모든 집안에는 비밀이 있다 / 가해자를 마음에서 떠나보낼 것

행복에 이르는 길은 몇 개일까 / 최적의 나로 거듭나는 길 / 성장의 조건 / 하강 성장

내가 있잖아 / 분노를 다루는 힘 / 충분히 슬퍼하고 떠나보낼 것 / 일생의 사랑을 위해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 / 시시비비 대신 역지사지

조심스런 사랑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 자유로운 애착 / 되찾는 관계 / 용서의 마음광야에 서다 /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다정함이 인격이다

김선희 지음

나무생각 / 2025년 2월 / 312쪽 / 19,800원

1장 마음이 깨진 당신에게

지치고 피로한 나를 먼저 살필 것

기실 피로 사회다. 우리 중에 피로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피로감을 인지하여 해소하고 처리하는 능력이다. 즉 피로 관리력이 필요한 것이다. 일과 사랑, 현재와 미래, 몸과 마음, 유무형의 자산, 내면과 외부 환경, 이 모두를 꾸려가기 위해선 하루하루 내 피로를 돌보는 자세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른 대단한 능력보다 하루하루 피로를 관리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핵심일지 모른다. 피로 관리력이 바로 슈퍼 파워다. 꿋꿋하고 의연한 성인으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피로 관리력이 필수다.

과부하에 걸린 사람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지쳐 있다’는 걸 명민하게 감지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에너지 수준, 가동 상태, 남은 에너지를 아는 것이다.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직업이 있든 없든 우리 일상은 외력과 내력이 싸우는 순간과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에게는 외부의 요구 사항이 있고 내면의 욕구가 있다. 외부의 요구 사항을 인지하고 대응하는 동시에 내면의 욕구와 소망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보살펴야 한다. 외부의 요구에 부응하느라 내면의 욕구를 무시하면 결국 탈진이 오고 일상과 심신의 건강은 어떤 식으로든 망가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적응’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적응과 부적응의 기로에 서 있다. 성공보다 적응이다. 적응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에너지 만능 시대여서일까. 우리는 자신이 지쳐 있다는 걸 감지하는 데 둔감하다. 상승하기 위해, 최고를 거머쥐기 위해 에너지를 가동하고 또 가동한다. 마치 무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양 살아간다. 외견상 안정되고 침착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고도의 만성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많다. 팽팽한 고무줄 그 자체다. 늘 달릴 준비가 되어 있다. 거머쥐어야 하고, 성취해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기에 내가 나를 몰아붙인다. 압박감과 한 몸이 되어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채찍질한다. 결국 일중독자가 현대사회에 넘쳐난다.

직장인들만 일중독이 아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부모 중에도 일중독자가 넘친다. 완벽하게 빈틈없이 자녀를 밀어붙이는 부모, 자녀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 불나방이 된 부모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부모의 헌신과 열정이라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니다. 과열 상태로 자녀의 삶에 침입함으로써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다. 자녀 삶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자녀다. 자녀들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얼마나 과잉으로 가동되고 있는지를 부모가 민감하게 감지하고 앞서서 관리해 줘야 한다.

짜증 다반사: 맹렬하게 살아가느라 피로감을 무시하면 외면당한 그 피로감은 다른 모습으로 둔갑해 출현한다. 대표적인 것이 짜증이다. 짜증은 공개적인 곳에서는 감춰지다가 집에 와서 드러날 수 있고, 회사에서 감춰지다 애인 앞에서 발현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 감춰지다가 온라인 악성 댓글로 드러나기도 한다. 불평불만, 한숨, 게으름, 과민함 등 다양한 증상도 부추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짜증이 표출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에는 주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발생한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갈등의 씨앗이 된다.

물론 짜증을 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와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짜증이 난다면 우선 내 컨디션을 점검하는 게 현명하다.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누군가를 들이받고 싶을 때, 호흡을 가다듬고 멈추자. 외부를 탓하기보다 ‘내가 지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다’, ‘내 누적 피로감이 쌓일 대로 쌓여 선을 넘은 것이다’의 가능성을 열어두자. 나를 재정비하는 것이 지혜롭다.

지쳤을 때 멈추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피로감을 명민하게 감지하는 사람은 일이 돌아가지 않아 과민해질 때 짜증을 낸다든지 타인을 탓한다든지 혹은 자신의 무능력을 자책하는 식의 소모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 멈춰 서서 심호흡하며 ‘초점’을 조정한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혹여 ‘내가 피로해서 이러는 것은 아닐까?’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자신을 놔준다. 그렇게 쉼표를 찍는다. 이들은 무언가를 시작할 때도 현실적인 내 에너지 레벨과 집중력 상태를 기준으로 삼는다. 진정한 효율이다.

그러나 경쟁적이고 전투적인 사람은 경쟁자, 타인 또는 슈퍼맨이 기준이다. ‘저 사람은 안 쉬는데 내가 쉰다고? 내가 더 앞서야지.’ 비교하는 마음이 솟아오르며 무리하게 밀고 나가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이게 바로 내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긴 자의 모습이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사람의 내면에는 끊임없는 비교하기 프레임, 경쟁심과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이럴 때 번아웃이 온다.

장기적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지 않는다.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이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그런 마음이 솟아날 때 스스로 현명하게 다스릴 줄 안다. 어깨에 힘을 뺀다. 심신의 상태를 정성스레 돌본다. 휘몰아치듯 급변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무엇보다 ‘내가 지쳐있다’는 것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살아갈수록 중요한 것은 에너지 보존: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은 나의 에너지 레벨이 하락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예전에 비해 나날이 떨어지는 심신의 에너지 레벨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평한 섭리다. 노화에 따라 에너지 레벨이 하락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가올 중년기와 노년기의 탁월한 적응을 위해 꼭 필요한 자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에너지 레벨이 저하되는 것을 부정하고 ‘포에버 영’을 외치며 20대처럼 살아간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이렇게 살아가면 이들에게 다가오는 건 실수와 사건·사고밖에 없다. 실제로 몸을 다치는 일이 많고 회복에도 긴 시간이 걸린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에너지 수준의 하락을 명민하게 감지하며 라이프스타일과 행동반경을 조정하는 것은 지혜로운 적응 행동이다. 행동반경과 대인관계 폭을 현실적으로 줄이는 대신 핵심적 활동(걷기, 운동, 식이요법, 내면 가꾸기, 취미와 레저 활동, 소중한 인간관계 돌보기 등)과 일상의 휴식에 좀 더 집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생을 평안하고 탁월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내 에너지를 잘 보존하며 생활할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 한계를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중요한 것은 끝없이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아니고 에너지 보존이다. 의외로 주변인들은 잘못이 없다. 내가 지친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남 탓의 늪

“선생님, 왜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내담자 P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절절함이 상담실 카펫에 스며든다.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유를 묻는 습성이 있다. 이 일이 왜 벌어졌지?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지? 저 사람은 왜 내게 이런 말을 하지? 우리는 인생의 꽤 많은 시간을 인과관계를 따지고 분석하는 데 사용한다. 합리적이건 편파적이건, 객관적이건 주관적이건 인과관계를 파고든다. 하지만 인간사에서 완벽하게 명확한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관계를 파고드는 그 자리에는 비난과 책임 전가만 난무할 뿐이다.

연인이나 부부 같은 일대일 관계에서 비난과 책임 전가 현상은 더 뚜렷해진다. 두 사람의 사랑과 의존, 기대와 좌절, 만족과 실망, 긍정 감정과 부정 감정, 욕구 충족과 욕구 불만이 오랜 세월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면서 두 사람은 강력한 감정적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친밀 관계, 애정 관계는 곧 감정 관계다. 감정의 상호작용이라는 배에 탄 두 사람이 갈등 상황에서 아무리 이성적으로 냉철히 노를 젓는다 해도 갈등의 원인과 답을 찾고 거기에 합의하는 일은 대개 실패로 끝난다. 인간은 자기중심성을 벗어던질 수 없는 존재인 데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대를 인정하기보다 내 입장을 고수하는 아집을 부리는 존재다. 감정과 감정이 얽히고설킨, 상호작용의 실타래 그 끝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뒤집어씌우고 빠져나오다: 난관과 좌절에 부딪힐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좋음과 나쁨’의 이분법으로 저울질을 시작한다. ‘행복과 불행’으로 가른다. ‘나쁨’, 즉 불행감과 좌절감, 실망, 환멸, 분노가 쌓였을 때 위험 스위치가 올라간다. 이 불행을 빨리 없애야 해. 어떡하지? 마음의 장부에 빼곡히 적힌 불행 리스트, 좌절 보따리를 쳐다본다. 난감하다.

그 찰나 우리는 책임을 떠넘길 사람을 찾는다. 지금 불쾌한 내 상태, 내가 느끼는 이 불행감과 분노는 내 잘못이 아니고 타인 때문이라 여기며 범인을 찾는다. 뒤집어씌울 사람 말이다. 연인 관계에서는 애인 탓을 하고, 부부간에는 배우자 탓을 한다. 그렇게 상대를 탓하며 나는 빠져나온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다른 걸 가르쳐준다.

자신의 불행감이나 좌절, 분노, 실망이 상대 탓이 아니라 나도 관여된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 상대방이 나를 자극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 불행의 단독 주범은 아니다. 자기중심적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건 무의미하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일어나는 감정과 좌절의 원인이 전적으로 외부 요인일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100%의 불행을 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너와 내가 만나 빚어내는 ‘그것’, 즉 전체 맥락과 상호작용을 관망하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 갈등 상황에서 파트너를 탓하고 배우자를 탓하는 한, 깨달음과 해결의 자양분은 얻을 수 없다. 인생이 옥토가 될 기회가 박탈된다.

애정 관계에서 책임 전가는 독이다: 내 불행에 파트너를 탓하는 마음 자체는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탓하는 마음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남 탓하는 행동은 자기중심적 발상이자 미숙한 행위다. 파트너에게 불찰이 있다고 해서, 배우자가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내 불행을 철저히 상대방 탓으로 돌려버린다?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고 당신만 원망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다.

난관 앞에서 내 행동과 사고방식은 점검하지 않고 상대 탓을 하며 갈등을 부추기고 싸움으로까지 이어 나간다면, 당신은 책임 전가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를 깨닫는 것이 상대의 심리적 불찰과 내 아픔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시작점이다. 상대도 문제지만 당신도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갈등 상황에서 남 탓을 하는 건 유아기적 대응이다. 어른의 다른 이름은 책임지는 자이기 때문이다.

2장 다름을 수용하는 새로운 방식

비판을 녹여내는 심리적 용광로

비판을 들을 때가 있다. 부당하다 느껴지는 비판, 어이없는 비판을 들을 때도 있다. 비판자가 얼굴 보며 지내야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에게 내 입장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을 명료하고 담대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기주장의 적정선을 넘어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 시도하거나 시시비비를 따짐으로써 불화를 일으킨다면 지혜로운 대처라 하기 어렵다. 나 또한 비판자, 공격자가 되어버린다.

대신 혼자만의 시간으로 돌아와 그 비판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얼토당토않은 극단적 비판이 아닌 이상, 그 비판은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어떤 정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스스로는 접하지 못했을 내 모습의 일부라 여겨보는 것은 어떨까? 아프지만 말이다.

알맹이를 찾아내자: 비판에서 독성을 제거하고 정제하여 알맹이만을 사용할 수 있다면 값진 레슨일 것이다. 알맹이를 만나 소화할 수 있는 강인함과 담대함이 안에 이미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강인함과 담대함은 용기의 다른 이름이다. 거꾸로, 알맹이를 소화함으로 강인함과 담대함이 내 안에 움트고 자라나기도 한다. 비판받음을 마음 상함으로만 끝내지 않았을 때 이 심리적 진실은 보람차게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과 타인을 긍정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면 비판 속 알맹이를 찾는 일은 좀 더 수월해진다. 건강한 사람은 낙관과 비관이 균형을 맞추고 있는 사람이다. 분명한 것은 현실적이고 희망적인 낙관이 최소한 51%는 되어야 살맛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야 너그러움을 발휘할 여지가 생긴다. 나를 비판한 상대방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내게 비판을 가한 의도가 명백한 악의가 아니라면 말이다.

생각과 관점, 욕구, 살아온 역사가 각기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선 비판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심리적 우아함이 필요하다. “어떻게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네가 뭐라고 감히? 네 주제에?”라며 자기애적 상처와 격노에 휩싸여 상대를 경멸하거나, “나에게 상처를 주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무 억울해! 그간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았어.”라며 피해의식을 갖거나, “그래? 너랑 이제 끝이야. 너 이제 필요 없어.”라며 상대방과 충동적으로 절교하는 선수 치기 대응은 지양하자. 미숙한 정신 승리일 뿐이다. 그 에너지를 보다 세련되게 사용하자. 세련된 다음 단계, 건강한 대응은 어떤 걸까?

비수를 녹이다: 우리 마음은 두 개의 원으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원은 ‘외부 자극을 즉각적으로 느끼는 마음’이고, 두 번째 원은 첫 번째 원을 품고 있는 큰 원으로 ‘첫 번째 원에서 느낀 마음을 녹여내는 마음’이다.

외부 자극, 즉 비판이나 충격, 갈등은 첫 번째 원을 향해 꽂힌다. 비수가 되기도 한다. 이때 첫 번째 원에서는 즉각적인 감정 반응과 스트레스 반응, 온갖 반사 반응과 위급 반응이 발생한다. 공격 태세가 될 수도 있다. 도망가 버리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외부 자극에 대한 동물적 생존 반응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외부 자극이 꽂히는 첫 번째 원(상처받은 마음)을 두 번째 원이 ‘녹여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외부 자극에 다친 마음, 상한 마음을 강인하고 담대한 ‘큰마음’으로 녹여낸다. 이것을 심리적 용광로라 한다. 내면에 심리적 용광로가 있다면 살아가면서 그만큼 든든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는 훈련을 통해 이뤄지는 것인지라 시행착오와 연습 그리고 믿음을 통해 생성될 수 있다. 시간이 걸린다. 값진 것일수록 획득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비판을 받았다면 비판으로 상한 그 마음을 심리적 용광로로 보낸 후 녹여내자. 용광로의 스위치를 올리면 필경 그 비판은 알맹이를 남기고, 잘 정제된 하나의 정보로 처리된다. 그런 뒤 강인하고 담대한 나로 의젓하게 살아가자. 상대방이 보든 말든.

부부, 두 사람의 대서사

부부 관계는 참으로 어렵다. 어려운 게 맞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낭만적으로 구애하며 황홀감과 충만감, 합일감에 빠져 있을 때는 결혼 생활이 이다지도 어려울지 상상하지 못한다. ‘아, 이 사람이다!’라는 흥분성 환희에 서로에 대한 탐색의 시기, 성격 검증의 시기를 축소시키거나 슬쩍 건너뛰기도 하고 쫓기듯 다급하게 결혼으로 돌진하는 커플도 있다. 알고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취향 몇 가지만 같아도 서로 운명이라고 확신하며 들뜬다. 부부로서 융화를 위해 정작 중요한 영역은 살펴보지 않고서 말이다.

결혼 후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부딪친다. 갈등과 실망, 분노와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배우자의 뚜렷한 불찰로 관계가 망가지기도 하지만, 어느 한쪽이 유달리 잘못한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부부 생활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도 한다. 부부 관계는 관계 난이도 중 최고 난이도를 보인다.

한배에 탄 생활공동체: 장기 애착 관계인 부부는 결혼 후 3~4년쯤 지나면서 낭만과 열정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현실의 의무, 구속, 제약이 두 사람을 꽁꽁 동여맨다. 결혼은 서로의 삶과 일상을 책임지는 ‘책임 관계’이기에 연애와 달리 무거울 수밖에 없다. 남다른 결속력이 요구된다. 나의 사랑받을 권리를 포함하여 내가 누리고 싶은 각종 권리보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 일원으로서 의무가 두드러지는 날이 허다하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연애 관계와 달리 한 지붕 아래 생활공동체인 부부는 함께 살며 눈에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상호 묶여 있다. 한배에 탄 것이다. 법으로도 묶여 있다. 둘은 함께하기에 즐겁기도 하지만 서로 피할 수도 없기에 상황에 따라 불편감이나 마찰도 일어난다. 친밀함과 독립의 딜레마다.

부부는 연인 관계와 달리 서로에게 차원이 다른 의존을 발생시킨다.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력도 남다르다. 겉과 속, 안과 밖, 표면과 이면, 모든 것이 뒤섞인다. 이 때문에 부부로 살면서 나를 감출 수는 없다. 나의 연약함, 부족함, 취약성, 수치심, 치부라 여기는 부분, ‘내 본질’을 감출 수 없다. 많은 부부가 자신의 본질이나 배우자의 본질이 드러났을 때 이혼을 선택하기도 한다.

부부는 결혼할 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고 깊은 부분도 공유하기에 거꾸로 서로를 가장 아프게 할 수 있는 관계다. 나도 모르는 마음속 감정 스위치, 고통 스위치를 배우자가 누를 수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법을 배우자는 알고 있다. 격한 감정 상태가 되면 배우자는 나의 그 스위치를 눌러버린다. 그 주제, 그 표현, 그 단어로, 그 시절 그 이야기로 말이다. 내 능력에 대해 저리 말하다니! 내 부모님에 대해 저리 표현하다니! 나에 대해 제일 잘 아는 배우자가 나의 결정적 부분을 건드리다니! 배우자에 대한 애정이 미움과 원망으로 바뀐다.

그런데 일상은 계속된다. 내일 시댁에 가야 한다. 이런 와중에 장인어른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이가 우리를 부른다. 새벽 6시에 출근해야 하는데, 다투다 보니 새벽 1시다. 연애 때와는 달리 서로의 감정 스위치가 올라간 상태에서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현실이다. 우리의 보금자리가 오늘은 원망스럽다. 기껏해야 안방을 거부하고 혼자 응접실 소파에서 잠을 청한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으니 이 집의 대출금이 머리를 내리친다. 이래저래 복잡하고 난감하다.

결혼과 연애는 난이도가 다르다: 결혼은 연애의 연장이 아니다. 결혼과 연애는 차원이 다르다. 연애와 차원이 다른 부부관계의 난이도를 정확히 파악하자. 고난도라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자. 당황하지 말자. 차분하고 냉정한 자세로 겸허히 임하자. 충분히 관찰하고 꾸준히 씨름하며 인내심으로 견뎌내자. 체험을 통해 연마되는 현실적인 주인의식을 장착하자.

부부 갈등은 쉬이 돌아가는 길도, 마법의 길도, 자동 해결의 길도 없다. 직면해 씨름할 수밖에 없다. 씨름하며 시행착오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성실한 씨름 속에서 깨달음과 함께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긴 호흡이기에 궁극의 보람도 크다. 긴 호흡 속 인내와 배움으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장을 얻게 될 것이다.

결혼이 주는 선물, 우리의 대서사: 삶은 순간과 순간이 연결된 거대한 스토리다. 그 스토리는 굴곡이 있어 쉽지도 않고 때때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보람과 가치가 있다. 인간은 구속 안에서 성장하고 관계 안에서 공동체로 진화한다. 그 스토리의 해피엔딩에 집착하기보다 순간과 순간, 그 과정에 참여하자. 서로에게 참여하자. 나의 삶처럼 배우자의 삶을 응원하자. 그 열띤 과정 속 각종 체험이 인생의 기쁨이고 삶의 보람이다. 과정 속 체험이 나를 만든다. 퍼즐 조각처럼 이어 맞추고 모자이크처럼 촘촘히 만들어가자. 두 사람의 사랑이, 부부애가 그걸 가능하게 한다.

삶의 탁월함은 저 끝의 결과만으로 한 컷에 정해져 버리는 게 아니다. 과정에서의 체험 그리고 너와 내가 관계 속에서 하루하루 엮어낸 서사 그 자체로 입증된다. 대서사가 있는 부부가 가장 행복하다. 내가 배우자와 함께 하루하루 쓴 서사가 내 마음의 내용을 만들고 나라는 한 인간의 구조를 세운다. 배우자도 마찬가지다. 배우자의 마음의 내용과 구조에도 내가 아로새겨져 있다. 서로 소중하다. 진정한 자존감은 이런 구조와 내용이 튼튼할 때 얻어지는 즐거운 부산물 아닐까? 긴 시간 함께함으로 인해 힘 있게 만들어지는 부부 공동의 자존감은 외풍을 거뜬히 견디게 도와준다.

부부가 상부상조하며 둘만의 서사를 담대히 써나갈 때 삶은 단단해지고 생기가 넘친다. 대서사 속 그 견실함이 자녀에게 건강히 대물림되리라. 배우자와 함께 한 지붕 아래에서 오손도손 살며 얻어지는 그 결실에 감사할 뿐이다. 내 곁에서 나를 참고 견딘 배우자의 노고와 사랑에 경의를 표한다. 긴 세월을 함께한 부부가 힘 있게 살아낸 시간으로 아로새겨진 두 사람의 대서사! 결혼과 부부애, 그것에 어울리는 기쁨과 보람의 결실, 영광의 결실을 기대하며 우리 모두를 축복한다.

3장 다정이 필요한 매 순간

다정함의 근원이자 필요조건

심리학자이자 실존주의 상담가 롤로 메이는 『사랑과 의지(Love and Will)』에서 “돌봄(care)은 다정함의 근원이자 필요조건”이라 말했다. 그에 따르면 나와 같은 또 다른 동료 인간에 대한 인식, 타인의 기쁨이나 고통에 대한 동일시, 우리 모두가 공통의 인간성이라는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인식, 연민과 죄책감의 요소로 구성된 것이 돌봄이다.

다정함의 근원이자 필요조건인 돌봄! 부부애의 정수도 나는 돌봄이라 생각한다. 특히 배우자가 아플 때의 돌봄이 그렇다. 일대일 애착 관계(특히 부부)의 주요 기능은 궁극적으로 ‘역경을 헤치고 살아남는 것’이다. 부부가 함께 즐거움과 행복, 성공 경험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사의 실체인 역경과 고난을 배우자와 함께 손잡고 헤쳐나가는 것이 애착 관계의 목적이자 목표이자 이유다. 역경과 고난을 함께 헤쳐나가기 위해선 단기 관계가 아닌 장기 관계 속 두 사람의 안전한 결합과 결속, 협력, 애착이 필수다.

수많은 문제를 품고 있는 결혼 제도가 지금껏 폐기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인간사의 본질인 역경을 뚫고 나가는 데 어른과 어른의 일대일 장기 애착 관계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모든 성장과 치유, 극복과 해결은 관계 속에서 돌봄을 주고받음으로 발생한다. “모든 치유는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정신의학자 주디스 허먼의 문장이다.

타인을 돌본다는 것: 부부에게 닥치는 수많은 역경 중 배우자가 병든 것만큼 애통한 것이 또 있을까? 인간이 더없이 약해지는 순간, 스스로 뭔가를 하기 어려운 상황, 어쩌면 죽음 앞에 한 발짝 다가선 그 시점에서 의미 있는 타인의 함께함, 돌봄은 불가피하다. 이때 부부애의 정수가 드러난다. 의무적 돌봄이 아닌 마음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돌봄이다. 오래된 애착, 두 사람만의 사연, 연민과 긍휼이 축이 되는 헌신적 사랑으로 배우자를 돌보는 것, 이것이 인간의 참사랑이다.

당신이 아플 때 당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의사의 진료, 치료약이면 다 되는가? 혹시 홀로 슬픔 속에 누워 있는가? 찾아오는 이가 없는가? 곁에서 손 잡아주고 회복과 쾌유를 기도해 주는 배우자가 있는가? 신체의 아픔은 단순히 육신의 고통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심신은 분리할 수 없다. 신체 질환으로 아픈 당신의 몸과 그 여파에 압도된 고통스런 마음은 당신의 삶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삶 전체에 온전히 함께하는 타인, 당신의 배우자는 내 아픈 몸과 마음을 넘어 고난의 인생마저 끌어안은 역사적 사랑의 증인이다. 이는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며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실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거룩한 다정함이다.

4장 결국 상처는 아문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몇 개일까

인생에서 묘책을 찾는 사람은 쉽게 불행을 느낀다. 그들에게 인생은 다양한 세상이 아니라 하나의 답이 정해져 있는 곳이다. 행복을 거머쥐기 위해 갖춰야만 하는 조건들이 명확하다. 그들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은 딱 하나다. 경쟁이 붙고 줄을 선다. 그러다 보니 애매모호한 선택의 순간이나 위기, 난관 앞에서 불안이 급상승한다. 손해 보면 안 된다. 묘책과 비법에 대한 욕구는 커져만 간다. 그것을 찾아 나선다. 마법과 같은 비법이 있다고 믿기에 ‘최고의 그 하나’를 찾아 나서는 사람은 흑백논리와 조급증의 화신이 되어버린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최적의 선택: 위기를 용기 있게 해결하고 인생을 원만히 살아내며 전진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 묘책이나 비법을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 최적의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탐욕적이지 않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외부 현실도 명확히 인지한다. 많은 것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행불행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관찰하고 숙고하며 분별하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현실적인 최적의 방안을 선택한다. 멈춰서 결단해야 할 최적의 순간을 안다.

그들은 인생이 대로(大路)와 지름길로만 이뤄져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금 돌아가더라도,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감정을 잘 추스른다. 그 지점에서 인생을 배우고 경험을 정리한다. 그들에게 인생은 다양성이 숨 쉬는 곳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의외로 살 만한 곳임을 믿는다. 그렇게 다양성을 누림으로써 새로운 것을 배운다. 배움이 곧 행복이다.

인생에서 불어오는 외풍을 무시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매번 외풍을 넘어서서 최적의 선택을 할 수만은 없다. 현명하다는 것은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미흡하더라도 대안을 찾아 수용하는 낮은 자세를 취한다는 뜻 아닐까? 아쉬움은 과감히 털어버린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기대 수준을 낮춰야 할 때를 감지하고 낮출 줄 안다. 자신의 한계, 상황적 한계를 정확히 고려한다. “최고가 되어야 해. 완벽하게 처리할 거야.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들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완료를 기뻐한다. 현실을 정확히 보고 숙고하며 최선을 다했다면 그들은 미흡하더라도 만족한다. 미흡하지만 행복할 수 있음을 안다. 미련 없이 털어버린다. 아님 말고, 종종 그렇게 가벼워진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수만 가지다. 위기와 난관을 해소하는 방법도 수만 가지다. 행복과 만족을 위해 단 하나의 묘책을 찾고 고집하는 것은 자기중심성, 강박관념과 불안일 뿐이다. 무의식적으로 특별 대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사고방식과 내면세계가 의외로 허술할 수 있고 오류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갈망하는 그것이 꼭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내가 집착하는 그 행복의 조건이 제대로 된 조건인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건인가? 검증한 적이 있는가? 그건 누구의 생각인가? 주입된 생각인가, 내 생각인가? 자신의 판단력과 세계관을 검증하지 않고 과신하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허술함과 엉성함을 아는 것이 지혜다.

뜻밖의 기회: 인생은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다. 통과하며 내가 넓어지고 단단해지는 과정이다. 인생에는 뜻밖의 불행도 오지만 뜻밖의 행운과 행복도 찾아온다. 뜻밖의 박탈도 있지만 뜻밖의 기회도 주어진다. 알 수 없는 세상에 나를 기꺼이 던짐으로써 다양한 경험을 채워가는 게 진정한 행복 아닐까? 나만의 대서사를 만들어가는 것, 참 멋지지 않은가? 하나의 묘책, 비법, 지름길, 완벽한 해법이 아닌 최적의 선택을 통해 나의 서사를 풍부하게 써 내려가자. 시행착오는 우리를 단련시켜 궁극에는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사랑과 고생이 교차하는 이 세상은 의외로 다정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인생의 본질이 광야라면 인생은 전부 광야뿐인가? 인생은 축제다. 살 만한 세상인 것이다. 뜻밖에 만나는 축제와 같은 순간이 찰나에 그칠지라도 그것은 진실로 가치 있다.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가라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을 모아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인생이 축제와 같음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더 큰 기쁨이 있다. 뜻밖의 감동과 즐거움, 환희가 있다. 그때그때 기쁨과 감동, 즐거움, 환희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일상 속 축제의 순간이 아닐까? 가족들과 함께 웃는 순간, 배우자와 산책하며 발견한 아름다운 나무, 달리기, 시원한 바람, 계절의 변화, 책을 완독한 순간, 생일 축하 인사,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자녀가 들려주는 신나는 이야기…. 지금 여기에서 벌어진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면 이게 바로 축제 아닐까?

축제를 위한 준비: 일상의 순간순간을 축제처럼 즐기기 위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은 무엇일까?

? 흘러가게 내버려둘 것: 과거에 붙들리지 말자. 이미 지나간 일과 더 이상 씨름하지 말자. 지나간 일, 두고 떠나자. 과거 그 일이 당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면 미래 어느 시점에 ‘그 일’을 보상하고 만회할 수 있는 계기가 오기 마련이다. 전화위복이 발생할지 모른다.

? 쾌락보다 기쁨: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쾌락, 소비성·소모성 즐거움, 지나친 재미는 중독을 일으킨다. 잔잔한 기쁨, 보람찬 기쁨, 소중한 타인과 햇살 받으며 건강하게 웃을 수 있는 기쁨을 추구하자.

? 소유보다 감상: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지 말자, 옷, 물건, 집, 돈, 젊음, 재능, 미모, 그리고 사람. 내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말자.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되돌아보자. 물건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정서적으로 허기진 것이다. 타인의 성취와 성과를 온전히 감상하자. 감탄하며 즐거이 누리자. 감상이야말로 소유를 대체하고 승화시키는 성숙한 방식이자 태도다.

? 평가보다 관조: 평가하지 말자. 단언과 판단을 보류하자. 관찰하고 관망하며 즐기자.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다면 개방적으로 질문하자.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면 인생은 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