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외 지음
윌북 / 2025년 4월 / 296쪽 / 19,800원
▣ 저자 프란치스코 교황 외
프란치스코 교황(Papa Francesco) -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Jorge Mario Bergoglio)로, 1936년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공학을 공부했으나 사제직을 선택하여 신학교에 들어갔다.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73년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으로 뽑혀 6년 동안 봉사했고, 1986년 독일로 가서 박사 학위 공부를 이어갔다. 귀국 후 코르도바의 고해 사제와 영성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1992년 보좌주교로 임명되었고, 199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가 되었다.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되었으며, 2013년 가톨릭교회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소박함과 겸손함, 가난한 사람들과 소수자에 대한 관심으로 전 세계에서 존경받고 있다.
파비오 마르케세 라고나 - 이탈리아 주요 민영 방송사인 메디아셋의 바티칸 전문 기자다. 매주 일요일 종합 뉴스 채널인 TgCom24에서 종교 코너인 〈스탄제 바티카네(Stanze Vaticane, 바티칸 방)〉를 진행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과 베네딕토 16세의 선출을 비롯해 가톨릭교회의 큰 행사들을 취재했으며, 이후 바티칸 스캔들,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출한 콘클라베 등을 보도했다. 2021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독점 인터뷰를 진행했다.
▣ 역자 염철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를 받고, 부산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를 받았다.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부총장으로 재임 중이다. 저서로 『바오로 서간』, 『배워봅시다 성경 언어』, 『가톨릭 신학을 소개합니다』 등이 있고, 역서로 『최고의 성지 안내자 신약성경』, 『신약성경 연구 방법론』 등이 있다. 2024년 한국가톨릭학술상 번역상을 수상했다.
▣ Short Summary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전 세계 언론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한다. 특히 건강이 악화되고 입원이 길어지자 숨소리 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실시간 업데이트되는 정보 속에 정작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다.
이 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밝힌 최초의 공식 자서전이다. 이탈리아에서는 2024년 봄에 출간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책”이며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가장 아름답고 친밀한 소통 방식”이라고 이야기해왔다. 그런 평소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세 살 때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의 어두운 그림자, 아르헨티나까지 휘몰아쳤던 원자폭탄의 공포, 사제 성소를 경험했던 순간과 어머니의 반대, 우연히 만난 소녀에게 한눈에 반해 흔들렸던 경험, 달 착륙과 마라도나의 ‘신의 손’을 봤을 때의 감정 등을 솔직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마치 입담 좋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1930년대부터 경험한 ‘결정적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의 경험은 마치 역사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고, 교황으로 선출되던 2013년 콘클라베의 순간은 1인칭 시점의 영화 같다. 탱고와 영화를 좋아하는 교황의 입담은 놀랄 만큼 솔직하지만, 유머러스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이 책에는 전쟁, 동성애, 교회 개혁, 기술 발전 등에 관한 교황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 교황 숙소를 선택하지 않고 산타마르타 관저에 머물게 된 배경, 2013년 콘클라베 당시의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 등이 상세히 담겨 있다. 인간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의 생각과 관점이 궁금한 사람뿐 아니라 교황의 다음 행보가 궁금한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차례
들어가며
I.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II. 유대인 학살
III. 원자폭탄
IV. 냉전 그리고 매카시즘
V. 달 착륙
VI. 비델라 쿠데타
VII. 신의 손
VIII. 베를린장벽의 붕괴
IX. 유럽연합의 탄생
X. 9·11 테러
XI. 경제 대침체
XII.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XIII. 코로나19 팬데믹
XIV. 아직 써 내려가야 할 이야기
나의 인생
프란치스코 교황 외 지음
윌북 / 2025년 4월 / 296쪽 / 19,800원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라디오에서는 연신 뉴스 속보가 쏟아졌다. 마리오 베르골료는 평소처럼 일터에 가기 전 라디오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방금 청소를 마친 아내 레지나가 옆에서 막간의 고요를 즐기고 있었다. 커피의 진한 향이 고향 이탈리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서인지, 마리오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작은아들 오스카르의 울음소리가 마리오의 평화를 깨트렸다.
마리오는 집을 나서며 작은아들을 안고 달래는 레지나와 포옹하고 인사를 나눴다. 조금 있으면 로사 할머니가 와서 막 세 살이 된 큰아들 호르헤를 데려가 낮 동안 돌보아줄 터였다. 마리오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충격적인 뉴스가 들려왔다.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마리오와 레지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유럽에 사는 친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 로사 할머니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르헤는 로사 할머니에게 달려가 안겼다.
***
로사 할머니는 제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어른이셨습니다. 저를 처음 주님께 이끌어주신 분은 할머니셨어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처음으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죠.
그 무렵 저는 막 세 살이 되었을 때니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 당시를 기억해내기는 쉽지 않아요. 라디오에서는 매일같이 전쟁 소식을 전했죠.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친척들이 편지로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 소식을 전해주었어요. 어른들이 편지를 큰 소리로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지.
원자폭탄
축구 경기가 시작하기 전 경기장의 라디오에서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상이 이끄는 일본 대표단이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 올라 항복에 서명했다는 소식이었다. 사실상의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이었다. 유럽에서는 이미 몇 달 전에 전쟁이 끝났었다. 연합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하자,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했던 것이다. 그리고 5월 7일 독일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1945년 9월 2일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적대 행위가 종식된 날로 기록되었다. 이날을 기억하며 오늘날에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발생한 희생자들을 애도한다. 원자폭탄으로 20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15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호르헤는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에게서 원자폭탄 이야기를 들었다.
***
1945년 8월, 원자폭탄 두 개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 재앙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치명적인 무기를 쐈다고 말했지만, 그 무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원자폭탄이 뭐예요?” 모두가 궁금해했어요. 시간이 지나자 신문과 라디오에서 원자폭탄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설명해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전쟁을 목적으로 원자력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리고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일어날 미래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범죄입니다. 매우 부도덕한 행위지요! 새로운 전쟁 무기를 만들면서 어떻게 평화와 정의의 옹호자인 양할 수 있을까요? 대량 살상 무기는 거짓된 안정감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무기가 만들어내는 것은 의심과 공포뿐이니까요. 폭탄과 같은 무기의 사용은 환경과 휴머니즘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합시다.
1948년 막냇동생 마리아 엘레나가 태어났는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셔서 더는 우리를 모두 돌보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49년 오스카르와 저는 엔리코 포촐리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산토스 앙헬레스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6학년으로 들어갔는데, 저는 기숙학교에서 무엇보다 공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운동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을 일깨워줌으로써 편견이나 방향 감각 상실이 없는 가톨릭 문화가 제 몸에 배게 해주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기숙학교에서 신실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습관들이 형성되었는데, 그 습관들은 가톨릭 가르침을 따르는 존재 방식을 형성해주었습니다. 열두 살 때 사제의 소명을 처음 느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용기를 내어 마르티네스 신부님께 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성소에 대한 열망은 195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강렬하게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냉전 그리고 매카시즘
1953년 6월의 어느 날 아침 7시, 호르헤 베르골료는 실험실 문을 열었다. 당시 16세였던 호르헤가 다니던 제12 산업학교는 학생들에게 공장이나 실험실에서 현장 실습을 하게 했다. 그러나 호르헤가 그 이른 겨울 아침 실험실을 방문한 것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호르헤를 맞아준 에스더 발레스트리노는 독재 때문에 조국에서 도망친 파라과이 생화학자였다. 에스더는 온화하면서도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에스더는 실습 시간 외에는 시사 문제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해주곤 했다. 에스더는 매일 아침 신문을 사 와서 읽었다. 그날 아침 신문 해외 면에는 미국의 교도소에서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에설 로젠버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두 사람은 2년 전 소련 스파이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다. 판사의 판결에 따르면 로젠버그 부부는 핵무기에 관한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고 한다. 이것은 냉전의 결과,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매카시즘의 가장 잔인한 결과였다.
***
비오 12세 교황님께서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은 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는 전 세계에서 지금도 집행되고 있는 사형을 용납할 수 없어요. 사형은 정의의 패배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사형이란 우리가 주님에게 받은 것, 즉 생명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로 결정하는 건 도대체 누구입니까? 제겐 그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로 보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단결하여 사형제 폐지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단결해서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에스더는 제게 책과 잡지를 추천해주었는데 그중에는 공산당 관련 출간물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수준에서의 독서, 그러니까 에스더가 속한 세상을 알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에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다고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부유한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빈곤에 관해서는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교회에도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재산을 공유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순수한 형태의 그리스도교입니다.
1950년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일과 사랑을 경험하고,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났으며, 무엇보다 사제 성소를 경험했습니다. 사제 성소는 초봄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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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과 학교를 오가는 동안 겨울이 지나고 남반구에 봄이 왔다. 1953년 9월 21일 월요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초봄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기지개를 펴고 있었고, 학생들은 봄 축제를 앞두고 약속을 잡느라 분주했다. 호르헤도 플로레스역에서 친구들을 만나 도시 밖에서 열리는 축제에 갈 계획이었다. 축제 날이 되기 몇 주 전 방송은 7월 한국전쟁이 끝났다는 소식과 9월 7일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스탈린주의의 비극적 시기를 이겨낸 많은 이에게 흐루쇼프의 선출은 단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바로 냉전의 종식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계를 두 블록으로 나누는 논리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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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9월 21일, 축제에 가려고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플로레스 대성당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주님께 인사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성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카를로스 두아르테 이바라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던 중 저는 갑자기 하느님을 만난 것 같은 놀라움을 경험했어요. 하느님은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분께서는 제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고해성사를 하면서 저는 주님의 자비를 느꼈습니다. “자비로 그를 바라보시고 그를 선택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불러 당신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마태오의 소명 사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문장이 나중에 저의 주교 모토가 되었고, 교황이 된 지금도 제 문장에 새겨진 것은 우연은 아닙니다.
그렇게 믿음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저는 그날 「사도행전」에서 바오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땅에 엎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 놀러 가려던 계획은 그것으로 끝났어요.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했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저를 맡기고 있었어요. 저는 완전히 압도당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혼자 조용히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에 갈 때까지 2년간 사제 성소에 대해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다가 마침내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셨지만, 어머니는 제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등을 돌리신 채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르겠다. 호르헤, 너는 이미 성인이야. 그래도 대학을 마치고 나서 결정하렴.” 어머니는 당신의 장남이 의사가 되는 걸 꿈꾸셨던 거죠. 로사 할머니는 제 성소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행복해하셨어요.
마침내 저는 엔리코 포촐리 신부님의 영적 지도를 받아 신학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열아홉 살에 비야 데보토 대교구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해, 저는 성소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소를 받기 전에는 여자 친구도 한 명 있었어요. 신학교에 다니던 때 삼촌 결혼식에 갔다가 한 소녀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어요. 얼마나 예쁘고 똑똑했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죠. 일주일 정도는 그 소녀의 모습이 아른거려 기도하기도 어려웠어요. 다행히도 그런 시기는 지나갔고, 다시 저는 제 소명에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1957년 8월, 신학교에 독감이 유행했습니다. 저도 독감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나았지만 저는 열이 가시지 않아 계속 방에 갇혀 지내야 했어요. 그리고 그해 11월, 낭종 3개가 생긴 오른쪽 폐의 상엽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고통은 너무도 심해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저는 교구 신학교를 떠나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58년 3월 11일 저는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칠레의 선교지에서 공부했어요. 그러고 나서 산타페에 있는 인마쿨라다 콘셉시온 학교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살바도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과 심리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같은 유명 작가를 초청해 학생들과 함께 기억에 남는 만남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에게도, 그리고 사제 서품을 앞두고 준비하던 저에게도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달 착륙
1969년 7월 20일 일요일 밤 10시 가까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늦은 시간에도 산호세 신학교 기숙사 불은 환히 켜져 있었다. 텔레비전 시청실에는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원장 신부님은 학생들이 역사적인 달 착륙 생방송을 볼 수 있도록 취침 시간을 늦춰줬다. 32세의 호르헤 베르골료도 그 방에 있었다.
사실, 호르헤는 빨리 방으로 돌아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5개월 뒤면 사제 서품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침묵과 기도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게 인생의 위대한 사건을 준비하는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최초로 달에 발을 딛는 것을 보는 것은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였다.
***
정말 잊을 수 없는 밤이었어요! 먼지 위에 새겨진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우주비행사가 한 말도 역사에 길이 남을 말이었어요.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입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 모두는 세상이 이제 다르게 변하리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지구로 돌아온 후 세 우주 비행사는 1969년 10월 중순에 바티칸에서 교황의 영접을 받기도 했어요. 그날 바오로 6세가 하신 말씀은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교황님은 우주비행사들에게 인간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신비를 알고자 하는 본능이 있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두려움도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그들의 용기 덕분에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인간은 우주를 향해, 더 큰 지식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사실 당시 저도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사제직이라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오로 6세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두려움에 대해 묵상했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렸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면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할 것입니다.
마침내 제 서품식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서른세 번째 생일을 나흘 앞둔 1969년 12월 13일이었어요. 어머니와 할머니, 형제자매들이 신학교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어머니는 미사 후에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첫 강복을 청하셨어요. 할머니가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셨던 게 기억납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셨어요. 아버지는 1961년에 심장 발작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포촐리 신부님도 아버지와 같은 해에 우리 곁을 떠나셔서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하셨어요. 할머니는 5년 후인 197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서의 임무를 마친 베르골료 신부는 1983년 산미겔로 돌아와 본당 신부 겸 막시모 데 산호세 신학교 원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52세에 고국으로 돌아온 베르골료 신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 있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살바도르 학교에서 일상을 시작했다. 그는 학교 옆에 있는 살바도르 성당에서 고해신부로 일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 베르골료 신부를 도와 부관구장으로 일하던 빅토르 조르징 신부가 새 관구장이 되었는데, 그는 아르헨티나 예수회 전체를 관장했던 베르골료 신부에게는 아주 작은 임무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베르골료 신부는 그의 결정에 순명했다.
겨울이 목전에 다가온 1989년 11월 9일이었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예수회 신학생 기예르모 오르티스였다. “호르헤 신부님, 빨리 텔레비전을 보세요.”
베르골료 신부는 텔레비전 시청실로 달려갔다. 텔레비전에서 나오고 있는 장면은 정말 놀라웠다. 동베를린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냉전의 상징인 장벽을 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곡괭이로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온 가족이 차에 올라타 국경으로 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걸어서 국경을 넘었다. 어떤 사람들은 검문소를 통과하지 않고 고통과 죽음을 초래하던 장벽을 넘고 있었다.
***
1989년 그날 오후, 우리 눈앞에서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을 통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춤을 추는 젊은이들, 건배하는 사람들, 서로 포옹하는 사람들, 눈물을 흘리는 가족을 보았습니다. 자유를 되찾고 억압과 폭력의 종말을 경험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죠.
베를린장벽은 오랜 시간과 노력, 과정을 거쳐 드디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는 이보다 덜 알려진 수많은 장벽이 놓여 있습니다. 장벽이 있는 곳에는 닫힌 마음이 있고, 형제자매의 고통이 있으며, 민족 간의 분열이 있습니다. 이렇게 분열되면 우정과 연대가 부족해집니다. 우리는 피로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으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물리적인 벽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평화롭게 지내지 못할 때, 바로 그곳에 우리를 갈라놓는 벽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장벽 대신 서로를 잇는 다리가 놓인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런 세상이 된다면 사람들이 함께 모여 형제애를 나누고 불평등은 줄어들며 자유와 권리가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기심과 개인적이거나 국가적 이익의 벽을 넘어 국경과 한계를 초월하여 조건 없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증오와 편협함을 증폭시키는 이념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1990년 7월 16일 저는 코르도바에 부임하여 예수회 공동체에서 영적 지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1992년 5월까지 1년 10개월 13일 동안 코르도바에 머물렀는데, 이 기간은 제 인생에서 매우 길고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장상들이 왜 저를 그곳으로 보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결정에 순명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유럽연합의 탄생
1992년의 더운 여름날 아침,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700킬로미터 떨어진 코르도바의 예수회 요양원에는 부엌 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 55세의 베르골료 신부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기도를 마치고 아래층에 있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베르골료 신부는 치마를 두른 뒤 스토브 앞으로 갔다.
전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자, 막시모 신학교 원장이었던 베르골료 신부는 2년 전부터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예수회 지도부가 결정한 일종의 유배 생활이었다. 그래서 베르골료 신부는 침묵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이 든 형제 사제들을 도왔으며, 세탁실에 힘을 보탰고, 가끔 산책을 나가곤 했다. 베르골료 신부는 마치 처음 사제직을 받았을 때로 돌아간 듯 보였다. 그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고독 속에서 자신의 삶을 면밀히 살피고, 내면을 연구하는 신비로운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새벽 5시 30분이 되자 잡역부로 일하는 리카르도가 도착했다. 리카르도는 점심 만찬을 위한 재료와 그날 신문도 가지고 왔다. 베르골료 신부는 리카르도가 들고 온 신문을 펴 보았다. 외신 기사 하나에 눈길이 갔다. 유럽 12개국이 유럽연합을 출범하기로 서명한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관한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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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의 탄생은 정치적 창의성이 발현된 가장 아름다운 결과 중 하나였어요. 12개 회원국은 보충성의 원리를 추구할 성공적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가톨릭교회의 요구를 세상에 구현하는 것이었어요. 그 요구는 바로 국수주의의 위험을 막을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유럽은 기본적으로 여러 국가로 이루어진 하나의 가족입니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각 국가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어떤 분야든 도움이 필요할 경우 개입하여 각 국가의 필요를 고려해야 합니다.
신문의 사설을 쓴 논평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유럽이 갈등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열을 종식시키려면 단결이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 관심은 전혀 다른 갈등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건 내면의 갈등, 마음의 갈등이었지요. 저는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를 이끌며 중요 직책을 맡다가 평범한 고해신부로 돌아갔습니다. 한 마디로 코르도바로 ‘유배’를 온 셈이었습니다. 사실 이곳에서 맡은 사역 역시 매우 중요하고 아름다운 사역인데, 당시에 제 마음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 제 마음의 등대가 되어주었던 것은 이냐시오 영성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주님께서 저를 시험하시고 제 마음을 더 잘 읽을 수 있도록 그 위기의 시기를 경험하게끔 하셨다고 확신합니다. 2년 동안 저는 저의 과거, 수도원 생활, 본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내린 선택,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저지른 실수들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저는 코르도바 예수회 요양원에서 보낸 침묵의 세월이 신중하게 미래를 바라보는 방법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는 늙고 병든 형제자매를 돌보고, 씻기고, 옆에서 자며 수발드는 일을 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라고 믿습니다. 가장 연약한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낮은 사람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은 모든 하느님의 사람, 특히 교회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제는 양 냄새를 풍기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때 저는 역사학자 루트비히 폰 파스토르가 쓴 『교황의 역사』 40권 가운데 37권을 읽었습니다. 그때의 독서는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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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5월이 찾아왔다. 전화벨이 울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우발도 칼라브레시 대주교 겸 교황대사의 전화였다. “주교님, 제가 가겠습니다.”
베르골료 신부는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도서실을 지나가다가 신문 하나를 집어 들었다. 베르골료 신부는 차에 올라타 신문을 펼쳤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2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92년 5월 12일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체결된 후 유럽의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고, 신문 기사에는 그 연설 일부가 발췌되어 있었다. 베르골료 신부는 그 기사를 눈여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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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의 연설은 옳았습니다. 당시 유럽이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는 국가들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육성하는 것이었죠. 유럽연합의 창시자들은 서로의 차이점을 조화시키려는 꿈을 갖고 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이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유럽연합 창립자들이 꿈꾸던 꿈이 이미 오래전 사라진 듯 보인다는 점입니다. 유럽연합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통합, 대화, 번영에 기반한 새로운 휴머니즘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정치의 중심에 인간을 둔다면,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희망이 남아 있기에 그 일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1992년 5월 13일 교황대사 칼라브레시 주교님은 저를 만나자 여러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시다가 갑자기 제 인생을 뒤흔들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당신을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좌주교로 임명했으며 5월 20일에 임명장이 발표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1997년, 칼라브레시 주교님은 저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하셨습니다.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 주교님은 건배를 해야 하니 케이크와 샴페인을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저는 오늘이 생일이시냐고 물었습니다. “아니요, 이건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잠시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이 덧붙였습니다. “6월 3일부터 주교님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새 부대주교가 되실 겁니다.”
저는 대교구장님이 연령 제한으로 은퇴할 때 대교구장직을 승계할 승계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콰라시노 추기경님은 제가 임명된 지 몇 달 후 서거하셨고, 1998년 2월 28일, 저는 갑자기 그 큰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르헨티나 국민, 특히 불행과 가난에 짓눌린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우선순위에 따라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가장 낮은 이들 사이에서 복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자 큰 선물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이들은 사랑을 갈망하는 눈으로, 침묵 속에 귀를 막는 모습으로 저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자리는 역사적으로 항상 추기경으로 가는 자리였기에 2001년, 요한 바오로 2세는 43명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저를 추기경으로 서임하셨습니다. 그해 2월 2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는 추기경회의가 열렸습니다.
9·11 테러
이제 64세가 된 베르골료 추기경은 그날도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일반 성직자 복장을 한 채 검은 가방을 들고서 대교구장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는 대교구청 3층에 있는 숙소에 살고 있었다. 그는 유서 깊은 대교구장 집무실을 포기하고 더 작고 소박한 방을 선택했다. 새 추기경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기사가 딸린 리무진도 필요하지 않았다.
9월 11일 오전 10시 20분, 자기 방에 머무르고 있던 베르골료 추기경의 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밖을 내다보니 교구청 직원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텔레비전에는 맨해튼의 쌍둥이 빌딩 가운데 하나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미국 특파원은 비행기가 고층 빌딩에 충돌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이 너무도 놀라워서 몸이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라고 물어볼 새도 없이 두 번째 비행기가 다른 타워에 충돌했다. “성모님…” 베르골료 추기경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기도했다. 어두운 연기구름이 맨해튼 거리를 뒤덮고 있었고, 먼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도망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어떤 이는 화염에 휩싸인 채 건물에서 몸을 던졌고, 사방에서 소방대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묵시록에 나올 법한 세상 종말과 같은 장면이었다. 이 공격으로, 거의 3,000명에 가까운 사람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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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전쟁은 서구의 심장부에까지 도달했습니다. 전쟁은 더 이상 중동이나 아프리카 또는 아시아의 일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날은 종교를 불문하고 모두가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례 없는 폭력 행위였고, 무고한 사람들을 부당하고 무의미하게 파괴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학살, 살인, 테러를 저지르거나 개인이나 국민 전체에 대한 박해를 정당화하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악을 저지르고자 주님의 이름에 호소할 수는 없습니다. 성직자의 임무는 종교의 이름으로 증오를 정당화하려는 그 모든 시도를 비판하고 밝혀내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에 대한 이런 우상숭배적인 왜곡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2013년 2월 11일 아침, 전화벨 소리가 대교구청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76세의 베르골료 추기경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추기경님, 제리입니다. 로마에서 전화드립니다.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황님께서 사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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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몇 초 동안 마비된 채로 서 있었어요. 처음에 저는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저널리스트 친구 제리 오코널이었습니다. 그는 두세 시간 뒤에 다시 전화를 걸어 사임이 2월 28일 저녁 8시에 발효될 것이며, 3월 10일 직후에 콘클라베가 열릴 것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제리는 전화를 걸어와 베네딕토 16세께서 2월 28일 오전에 추기경단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이며 모든 추기경은 로마로 소환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2월 28일 저녁 8시부터 ‘세데 바깐떼(교황의 공석)’가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28일 아침이 되자 우리 추기경들은 모두 베네딕토 16세의 퇴임식을 위해 클레멘티나 홀로 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네딕토 교황님은 콘클라베에서 선출될 새 교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과 순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정각 8시, 교황 공석이 시작되었고, 그 시간부터 교회는 교황을 모시고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같은 날 저녁 교황의 궁무처장인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은 숙소를 봉쇄하고 추기경단과 함께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그렇게 콘클라베 준비가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3월 4일부터 11일까지 매일같이 추기경 총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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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언론이 몰려들어 추기경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추기경들은 회의가 열리는 새로운 시노드 홀 입구에서 사진기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아래 인사를 나누며 환담을 주고받았다. 때는 이미 3월 9일이었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그날 추기경단 앞에서 발표할 연설문을 작성해왔다. 교회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 다음 교황이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에 관한 글이었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스페인어로 손수 적어 온 메모를 읽기 시작했다. 발언 시간은 3분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시간이 다 되면 마이크가 자동으로 꺼진다는 점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복음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복음화는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복음화의 기쁨.”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복음화는 사도적 열정을 의미합니다. 복음화를 위해서는 교회가 스스로 밖으로 나가는 담대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을 벗어나 주변, 즉 지리적 주변뿐만 아니라 실존적 주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죄의 신비와 고통, 불의, 무지와 신앙의 부재가 가득한 주변부를 향해, 그리고 주변부의 생각과 주변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불행을 향해 나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2. 교회가 복음화를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가지 않을 때 교회는 자기중심적이 되고, 그렇게 병들고 말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를 점점 괴롭히고 있는 병은, 일종의 신학적 나르시시즘인 자기중심성에서 나옵니다. 자기중심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가두고 밖으로 내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3. 교회가 자기중심적일 때 그 문제점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 빛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교회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밖으로 나가는 복음화하는 교회, 곧 하느님의 말씀의 교회. 아니면 자기 안에서,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세속적인 교회. 이 두 이미지는 교회가 영혼 구원을 위해 어떤 변화와 개혁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4. 차기 교황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를 통해 교회가 자신을 벗어나 실존적 주변부로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 교회가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복음화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열매 풍부한 어머니가 되도록 도와줄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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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설이 제 운명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제 인생이 바뀌는 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았어요. 연설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그 순간부터 제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는 말을 나중에 듣게 되었습니다.
교황 선출 당일이 된 3월 13일 오후 다시 콘클라베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투표에서 저는 거의 당선될 뻔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날 오후 세 번째 투표에서 77표로 제가 3분의 2를 득표했을 때, 모두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우메스 추기경이 저에게 다가와 포옹하며 했던 말씀은 지금도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저는 교황으로서 사용할 이름을 정했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리기 위해서였죠.
새로 선출된 교황을 보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보며, 저는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깃발, 기도, 노래… 비가 내리는데도 모두 새 교황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교회 전체에 은혜의 순간이었던 그 순간, 주님께 감사하는 기도의 합창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최근 우리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전쟁들과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폭탄으로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동정하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폭탄을 내려놓으세요. 권력에 대한 갈망을 멈추세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제발 멈추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우리가 창조 세계에 대해 벌이고 있는 일들은 하느님에 대한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한 이들에 대한 심각한 배신입니다. 약자들은 자연 파괴의 결과로 누구보다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뭄으로 황폐해진 땅을 떠난 기후 난민, 파괴적인 홍수나 폭풍 같은 기상 현상으로 피해를 입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구의 외침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젊은이들의 미래와 인류의 미래를 걸고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비극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연약한지, 그리고 인류가 얼마나 많은 것을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하는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 대한 착취가 점점 더 집요해지고 있습니다. 환경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고, 해결이 시급합니다. 우리 모두가 진로를 바꾸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고, 오랜 세월 우리가 해왔던 희생이 헛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써 내려가야 할 이야기
스위스 근위병은 몇 시간 전부터 산타마르타 관저 2층 엘리베이터에서 멀지 않은 교황의 방 앞에 서 있었다. 87세의 교황은 방문객에게 선물할 책을 고르려고 복도로 나왔다. 잠시 후 교황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에 내려왔다. 교황은 문을 가볍게 두드린 후 손님이 기다리고 있던 방으로 웃으며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원하면 재킷을 벗으세요. 격식 차릴 필요 없습니다.”
교황은 편하게 인사를 건네며 손님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짧은 농담과 기도에 이어 전쟁, 스포츠, 종교 간 대화 등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가톨릭교회가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었다. 약 30분간 대화가 이어졌을 때 손님이 말했다.“성하, 교황님께서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시기 때문에 교황의 이미지가 훼손되고 있다고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들어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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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우선 저는 사제이고 사목자입니다. 사목자는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하고, 사람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 위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일부로 사셨고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바티칸이 유럽의 마지막 절대군주국이며, 이곳에서 법정 다툼과 정치적 책략이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방식은 포기해야 하고 또 극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미래에 대해, 다른 꿈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속성을 지닌 온유하고 겸손하며 봉사하는 교회가 되는 미래, 그래서 부드럽고 친밀하며 자비로운 교회가 되는 꿈입니다. 우리는 참신한 것을 많이 찾아내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해나감으로써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어머니이신 교회를 상상합니다. 어머니 교회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 과거에 단죄받았던 사람까지 모두를 포용하고 환영합니다. 저는 그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 특히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경직성을 버리는 것, 지적하고 단죄하는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신앙을 보존하고 증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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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책상 위에는 많은 서류파일과 편지 몇 통이 놓여 있었다. 그중에는 산도나토 밀라노네에 사는 안나라는 여성에게서 온 편지가 있었다. 안나는 남편과 사별한 후 혼자 자폐가 있는 아들 니콜라스를 돌보고 있었는데, 니콜라스는 교황을 만나고 싶어 했다. 교황은 수화기를 들고 안나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니콜라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니콜라스의 안부를 물은 후에는 몇 주 전에 만났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는지도 물어보았다. 상대방은 전화를 끊기 전에 교황에게 물었다.“성하, 인류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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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은 오늘날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돌아보게끔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평화 아니면 죽음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유럽에서는 1914년 이후 100년 넘게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공장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무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지금도 세상은 곳곳에서 벌어지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총소리를 멈출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다고 반복해서 말해왔습니다. 중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세계의 지도자들과 통화하면서 그리스도인이든, 무슬림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도대체 왜 그들이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까? 폭탄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를 책임 있는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지구 곳곳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세우는 대신 새로운 무기 구입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바티칸은 무기나 군대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황청도 역사적으로 금융 투자에 관여했기 때문에 가장 수익성이 높은 주식이 무기 공장과 낙태 약물 관련 주식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큰 스캔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류의 미래는 우리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포용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 평화를 이야기하고 대화 테이블에 앉기를 희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종말이 닥칠 것입니다. 저는 인간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범한 실수에서 배우고 개선하여 미래 세대에 좋은 것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 곧 저의 인생과 여러분의 인생, 더 나아가 인류의 인생, 이 모든 인생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작은 발걸음을 내디디며 스스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목표를 달성하며, 때로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러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게 바로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온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추억을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듣는 이들에게 소중한 것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사는 법을 배우려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장벽을 허물고, 갈등을 극복하며, 무관심과 증오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예수님처럼 굳어 있는 마음을 녹이고 변화시켜 이웃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타적인 사랑만이 세상을 바꾸고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 대신 사랑과 기도가 사람을 움직였다면 제가 살아온 80년의 역사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요?
세상은 점점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부디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더 많이 기도합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부탁하겠습니다. 잊지 말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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