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무라 유키코 지음
미디어숲 / 2025년 3월 / 240쪽 / 18,800원

▣ 저자 모토무라 유키코
1966년생. 규슈대학 문과 교육학부를 졸업했다. 1989년 《마이니치신문》에 입사 후 20여 년 넘게 과학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2006년 제1회 과학 저널리스트 대상을 수상했고,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힘을 쏟으며 도야마대학, 국제기독교대학 등의 강단에 서기도 했다. 저서로는 『이과 사고』, 『궁금한 과학』, 『과학의 편』, 『과학 취급설명서』, 『과학의 힘을 강하게 만들기!』 등이 있다.
▣ 역자 김소영
다른 나라 언어로 그려진 책의 재미를 우리나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번역을 시작했다. 저자의 색깔에 녹아든 번역을 추구한다. 엔터스코리아에서 일본어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주요 역서로는 『눈부신 수학』, 『세상에서 가장 쉬운 철학책』, 『심리학 용어 도감』 외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교육학을 전공한 문과 출신이지만 일본의 권위 있는 신문사 《마이니치신문》에서 과학 기자로 20년 이상 경력을 쌓아온 저자는 스스로를 ‘잡식성 과학 기자’라 칭하며, 과학이라는 넓은 세상 속에서 발견한 작고 소소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인류의 과학이 눈부신 도약을 이룬 최근 수년간 그녀가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던 글들을 정리한 이 책은 화려한 발견이나 대단한 성취보다는 일상의 틈새에서 발견한 과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저자는 기생충을 사랑한 박사의 열정, 가사 로봇 현실이 될까, 그리고 우주여행에 관한 철학적 질문까지 다채로운 주제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물리학자와 생물학자, 환경운동가와 과학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고, 그 속에서 독자는 과학의 본질을 새롭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에는 화려한 연구 성과 뒤의 고민과 열정, 그리고 때로는 실패의 기록까지 녹아 있다. 저자는 이를 통해 과학이란 단순히 성공적인 프로젝트나 첨단 기술의 대명사가 아니라, 우리 삶을 구성하는 모든 작은 순간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저자는 과학이 가진 양면성을 다채롭게 조명한다. 원자력과 환경 문제, 전쟁과 기술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독자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과학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과학의 빛과 어둠을 모두 다룬 저자의 글은 독자가 과학을 단순한 도구로만 인식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ㆍ윤리적 맥락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과학이 가져온 혜택은 크지만, 그 이면에 남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전해진다.
저자는 과학을 어렵고 거창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책의 글은 우리에게 과학적 사고란 곧 호기심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크고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가장 빛난다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히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독자들에게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위, 아래, 그리고 대각선으로 시선을 확장하며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과학의 창이 되어준다.
▣ 차례
1. 박사가 사랑한 기생충
- 물리학자의 뇌 속에서 펼쳐진 우주 / - 흰 가운을 벗고 턱시도를 두르는 날
- ‘갑툭튀’가 제일 무섭다 / - 고분(古墳)을 투시하다
- ‘인류세(人類世)’,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 - 매머드가 되지 않기 위해
- 사차원 포켓의 미래 / - 가사 로봇, 현실이 될까?
- 바이러스, 지나치게 똑똑한 ‘하숙인’ / -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 우주여행, 거기에는 어떤 볼일이 있을까? / - 테크놀로지로 퍼져 나가는 세계
- 모르니까 더 재미있다 / - 사느냐, 죽느냐
- 고양이와 개다래나무 / - 또 한 분의 조상님
- 색다른 만남, 색다른 맛 / - 박사가 사랑한 기생충
- 자연에 집중하면 수학이 보인다 / - 0에서 1을 창조하다
2. 숲, 장작, 그리고 사람
- 열대 우림에도 같은 시간이 흐른다 / - 피어라, 져라, 인간의 뜻대로
- ‘탄소 중립 사회’, 꿈인가 신기루인가? / - 바나나로 지구의 현재를 생각하다
- 오가사와라의 음색 / - 사지 않고 버리지 않는 사업
- 파괴적 이노베이션 / - 파타고니아의 결단 / - 오버슈트
- 식탐 탈출! 과식은 이제 그만 / - 지속 가능한 세상을 꿈꾸다
- 숲의 왕국을 이끄는 자 / - 숲, 장작, 그리고 사람
- 조상들의 항해술 / - 인간과 미생물의 기나긴 인연
- 식탁 위의 풍경, 이제는 변화가 필요할 때 / - 포도와 사람과 떼루아
- 달을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다 / - 도심의 거리를 거닐던 소들
- 눈물은 아낌없이 / - 매실주 너머의 뒷산 / - 살아 있으면 나오는 것
- 코로나바이러스로 얻은 것들 / - 우주, 다양성으로 가득한 무한의 공간
- 눈부시게 아름다운 우주의 멜로디 / - 슈퍼 푸드 곤충 / - 대상포진이 보내는 경고
- 아프니까 산다 / - 코끼리에 밟히는 듯한 고통이라니
- 더 높이, 더 멀리 / - 구름을 알고 사랑하는 기술
3. 과학의 빛과 어둠을 살았던 학자
- ‘물의 행성’에 살다 / - 도움이 된다? 안 된다?
- 체르노빌의 목소리 / - 과학의 빛과 어둠을 살았던 학자
- 애국심이 독가스를 낳는다 / - 포옹이라는 선물
- 과학을 사랑한 소녀 / - 만지고, 보다
- 세계에서 가장 강한 여자아이 / - 북극성처럼 빛나는 꿈
- 밤하늘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 / - 봄, 공원에서
- 우유 한 잔, 일상의 여유 / - 그래서 더 인연을 맺는다
- 좌표축을 찾는 여행 / - 밝게, 가볍게, 부드럽게
- 홀로 살아간다는 것 /- 치매, 모두의 일이 될 수 있다
세상을 읽는 과학적 시선
모토무라 유키코 지음
미디어숲 / 2025년 3월 / 240쪽 / 18,800원
1. 박사가 사랑한 기생충
흰 가운을 벗고 턱시도를 두르는 날
2019년의 노벨화학상은 리튬이온전지를 개발한 요시노 아키라 씨에게 돌아갔다. 리튬이온전지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전기 자동차 그리고 소행성 탐사선 하야부사에도 탑재되어 모바일 문명에서 빠질 수 없는 어둠의 강자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명의 이기를 낳은 과학자나 기술자야말로 ‘어둠의 강자’다. 아침에 일어나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고 우리가 약속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그들 덕분이지만, 우리는 평소에 거의 의식하는 일이 없다. 애초에 그들 스스로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의 의지를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은 감사의 말보다 당장 눈앞에 놓인 연구 과제다. 호기심에 이끌려 무아지경에 빠지는 일, 머지않아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 곧 그들의 기쁨이다. 세간의 주목이나 보상은 나중에 따라오는 것이다.
보상 중에서도 노벨상은 각별하다고 봐도 좋다. 1901년에 창설된 이후 걸출한 과학자들이 이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수상식은 매년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에 스톡홀름에서 열린다(평화상은 오슬로). 턱시도나 드레스를 차려입은 수상자들은 친족이나 내빈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메달과 증서를 받는다. 수상식이 끝나면 장소를 옮겨서 국왕이 주최하는 만찬회가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전 세계에서 1,300명 정도만 참가할 수 있는 특별한 밤. 나는 취재를 하러 딱 한 번 참가한 적이 있다. 취재자들에게도 최상급 드레스 코드가 요구된다. 롱드레스를 입긴 하지만, 컴퓨터나 자료가 든 무거운 가방과 카메라를 바리바리 싸든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원고를 전송하고 나서는 만찬을 즐겼다. 메뉴는 전채요리, 메인요리, 디저트로 딱 3가지다. 여기에 최고급 샴페인 동 페리뇽 한 잔을 곁들인다. 요리와 요리 사이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나 수상자의 연설이 들어간다. 가짓수는 적지만 1,3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전부 다 서비스하려면 이게 최선일 거다. 이날을 위해 발 벗고 달려온 셰프들이 솜씨를 뽐낸다. 요리를 테이블로 옮기는 일은 공모에서 뽑힌 국민의 몫이다.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 이벤트는 스웨덴의 국민 행사다. 이튿날 아침에 현지 기사에는 직전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만찬회의 메뉴와 그날 공개한 여왕의 드레스 이야기로 자자하다. 찬란하게 빛나는 한 주를 마친 수상자들은 각자 나라로 돌아간다. 동 페리뇽과 드레스는 없지만, 다시 자극적인 연구 인생의 막이 오른다.
‘갑툭튀’가 제일 무섭다
과학 기자에게 노벨상이란 해마다 한 번 찾아오는 축제와 같다. 게다가 연구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널리 알릴 절호의 찬스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시차 문제 때문에 일본에서는 저녁 시간에 발표가 난다는 점이 꽤 골치 아프다. 이튿날 조간신문에 실릴 난해한 과학 문제를 밤사이에 알기 쉽게 정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은 누가 최종 후보에 남아 있는지 미리 알 수 있다. 그런데 노벨상은 선정 과정이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통 보안’을 자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십 명이나 되는 후보군에 맞게 일일이 원고를 만들어 준비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갑툭튀’ 수상자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2002년에 화학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 씨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노벨상 웹 사이트에 뜬금없이 나타난 ‘Koichi Tanaka’라는 이름. “누구야?”, “원고도 안 써 놨는데, 어디 소속의 누군지 찾아내!” 곧이어 다나카 씨가 교토의 시마즈 제작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랴부랴 번호 안내 서비스에서 알려준 홍보과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전화를 받은 남성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귀사의 다나카 고이치 씨가 노벨상에 선정되셨습니다.”남성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네? 저희 다나카요? 그게 누구죠?”
얼빠진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홍보과에 있는 모든 전화가 불난 듯 울려댔다.
나중에 들었는데 이날은 시마즈 제작소의 ‘야근 없는 날’이었다.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던 부장도 마침 귀가하려고 정리하던 참이었다고 한다. 당사자인 다나카 씨는 그 당시 수상 소식을 알리려고 자신의 책상으로 직접 걸려 온 국제전화를 받고 매우 당황했다. 순간 누군가 장난을 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고 한다.
그는 단백질 분자를 분해하지 않고도 분석하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공적을 인정받아 수상하게 됐다. 박사도, 관리직도 아닌 마흔셋의 기술자가 갑자기 세계 무대로 끌려 나온 것이다. 기자회견은 물론, 전철을 타고 통근할 때도 항상 작업복 차림인 그의 ‘수수함’에 많은 사람이 친근감을 느꼈다.
큰 화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다나카 씨는 기자회견에서 중요한 결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기술을 발전시켜 의료에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퇴근길에 잠깐 약국에 들러서 혈액 한 방울만 가지고도 어떤 질병들을 앓고 있는지 그 자리에서 진단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당시에는 ‘에이, 되겠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듣고 있었는데, 다나카 씨는 약속대로 소량의 혈액만 가지고도 치매나 암을 조기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을 현실로 만들었다.
연구자들에게 노벨상 수상은 단지 ‘통과점’일 뿐이다. 외부 요인에 꿈쩍하지 않고 몰두하는 연구 자세에 진정한 노벨상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닐까?
고분(古墳)을 투시하다
2020년 1월, 역사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던 나라현 하시하카 고분의 내부를 투시하는 실험이 시작되었다는 뉴스였다. 이 가짜 뉴스 같은 소식은 놀랍게도 진짜였다.
하시하카 고분은 왕족과 연관 깊은 유적이라는 사실을 이유로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리 학술이 목적이라 할지라도 무덤을 파헤치는 발굴 작업은 꺼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에 고분이 있으면 그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것이 인지상정. 그렇다면 투시를 해 보자.’ 이런 흐름으로 이어져 작업이 시작되었다.
투시하는 눈의 역할은 우주에서 떨어지는 ‘뮤온’이 담당한다. 뮤온은 소립자다. 지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선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그중 일부가 대기와 충돌하여 뮤온으로 변신하는데, 사람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 1m 땅 위에 1분당 1만 개나 떨어진다. 사람의 몸은 물론이고 바닥과 아스팔트, 두께가 1km나 되는 암반조차도 죄다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뮤온의 투과력은 물질에 따라 다르다. 관찰하고 싶은 물체를 통과한 뮤온을 특수 필름으로 받아내면, 불에 쬐었을 때 글씨가 나타나는 종이처럼 진한 곳과 연한 곳이 떠오른다. 그 결과물로 내부 구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건강 검진을 받을 때 많이 쓰는 엑스선 사진도 같은 구조를 사용한다. 엑스선의 투과력은 뮤온만큼 좋지 않지만, 인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뼈나 폐 속 상태를 알 수 있다.
2017년에는 이집트에 있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뮤온으로 투시한 결과가 영국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되었다. 이를 통해 중심부에 총길이가 30m나 되는 미지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혹시 그 공간에 왕관이 놓여 있는 건 아닐까? 상상은 점점 부풀어 오른다.
일본에서는 화산을 투시해서 지하의 마그마 웅덩이 크기를 추산하거나 지진을 일으키는 지하의 단층 구조를 밝혀내는 연구가 활발하다. 직접 파내려고 하면 거액의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뮤온을 이용하면 그런 수고도 절약할 수 있다. 실제로 사고를 일으킨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에서도 방사선이 강해서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는 2호기의 원자로 내부를 이 기술로 투시해 녹아내린 연료의 모습을 파악했다.
바이러스, 지나치게 똑똑한 ‘하숙인’
『집주인과 나』라는 만화 에세이가 2019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개그맨과 하숙집 주인의 모습을 따스하게 그려낸 만화다. 가족도 연인도 아닌 사람과 한 지붕 아래에서 유지하는 절묘한 거리감이 보는 사람까지 흐뭇하게 만들어 인기를 얻었다.
온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는 바이러스도 사실 그런 존재이다. 바이러스는 식물, 인간, 동물, 세균 등 모든 생물에 기생한다. 따지자면 생활이나 식사를 일방적으로 숙주에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하숙인보다는 더부살이에 가깝다. 바이러스는 생물의 몸 안에 멋대로 들어와서 세포 수가 늘어가는 구조에 편승해 자기편을 늘린다. 그렇게 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가끔은 숙주를 점령할 때도 있다. 숙주가 죽는다는 걸 안 순간 다른 숙주로 갈아타서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이게 바이러스다.
과학자들은 의학 역사 속에서 소중한 가족이나 가축을 괴롭히는 의문의 병원체의 정체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바이러스를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다. 물론 정체를 알아낸 것은 아니다. 광견병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세균이 아닌 광학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무언가’를 원인으로 지목했고, 이것을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19세기 말의 일이다. 그 후 100년 남짓 동안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20세기에 전자현미경을 발명하면서 바이러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바이러스의 DNA나 RNA를 해독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한 것이 바이러스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성질이나 다양성과 더불어 의외의 측면도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세균에 선옥균과 악옥균이 있는 것처럼 바이러스에도 인간에게 유익한 ‘선옥 바이러스’가 있다는 것이다.
임신한 여성은 타인(남편)의 유전자를 절반 물려받은 태아라는 이물을 10개월 동안 태내에서 기른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는 면역이 작용하여 이물을 배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임신을 하면서 만들어진 특수한 막 덕분이고, 놀랍게도 그 막은 먼 옛날에 인간에게 옮겨 온 바이러스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렇게 보면 바이러스는 더부살이는커녕 인류의 번영을 든든하게 받쳐 주는 존재다.
바이러스 생명의 역사는 30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서로 방해하지 않고 가끔은 상부상조하는 거리감을 지킬 수 있는 한, 바이러스로부터 배울 점은 크다. 단, 숙주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형태를 바꾸고 종에서 종으로 옮겨 다니며 비행기나 배를 타고 바다도 건널 수 있으니 그 지혜가 가끔은 버겁다. 부디 현명하게 어울리는 법을 밝혀냈으면 한다.
박사가 사랑한 기생충
‘특이하고 제한이 없으며 매력적이다.’
메구로 기생충관. 기업가 빌 게이츠가 칭찬한 이 사설 박물관은 도쿄도 메구로구에 있다. 40평 정도 되는 전시 공간에는 국내외의 기생충 표본이 나열되어 있다. 성인 남성의 장(소장 또는 대장) 안에서 8.8m까지 성장한 조충과 이를 정교하게 재현한 확대 모형 등 독특한 전시물들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내가 도쿄에서 살기 시작한 25년 전, 처음으로 방문한 박물관이 이곳이었다. 괜히 무서운 걸 보고 싶은 마음에 찾았는데, 집에 갈 때는 친근감이 생겼다. 젊은이, 커플, 고령자, 외국인 여행자 등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빌 게이츠도 일본을 방문했을 때 개발도상국의 공중위생을 보기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서 들렀다고 한다.
소장 중인 표본이 6만 점 이상이고 세계 유수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이 박물관은 가메가이 사토루 박사가 사재를 털어서 설립했다. 마을 의사로 생계를 꾸리면서 개관의 꿈만 꾸다가 진료소 건너편 목조 가옥에 ‘메구로 기생충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을 때가 1953년이었다. 전시품 고작 몇 점만 가지고 시작한 일이었다.
인류와 기생충의 관계는 그 역사가 매우 길다.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서는 주혈흡충이 발견되었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서 『의심방』에는 기생충 아홉 종류와 구제 방법이 적혀 있기도 하다.
기생충은 원래는 기생한 대상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평화로운 생물인데, 다른 동물을 마지막 숙주로 삼았던 기생충이 실수로 인체에 흘러들어오면 골치 아프다. 아프리카 등의 개발도상국에서는 3대 감염증인 말라리아와 더불어 하천 맹목증, 필라리아병 등 기생충 때문에 생기는 병이 지금도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가메가이 박사는 그런 기생충의 생태를 널리 알림으로써 일본의 위생 환경을 향상시키고 싶었다. 환자에게서 구제한 기생충과 더불어 박제업자에게 받은 동물의 내장을 해부해서 차츰 표본을 늘렸다. 그는 ‘아무튼 모든 열정과 금전을 기생충관에 바쳤다.’라며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지금도 항상 연구원들이 의미있는 연구 성과를 내보내고 있다. 교육이나 계발로 돈을 벌면 안 된다는 견해를 고수해 입장료는 무료다.
사실 박사는 개성 넘치는 기생충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조충은 몸의 마디마다 생식기를 가졌으며 하루에 몇 cm씩 쑥쑥 성장한다. ‘일본쌍고리기생충’은 유충 두 마리가 합체해서 마치 성충 한 마리인 양 살아간다. 박사는 오래도록 베일 속에 꽁꽁 싸여 있던 수많은 수수께끼를 밝혀내는 데 인생을 걸었다.
현재의 사무장인 가메가이 세이치 씨는 박사의 손자다. 그는 ‘맹렬히 열정적인 사람이었다’라며 할아버지를 회고했다. 다섯 살 되던 해의 봄에는 장난감도, 그림책도 아닌 작은 밭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어린이 밭에 대해 알려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씨앗은 직접 뿌릴 것. … 부디 조금이라도 생명을 기르는 즐거움을 맛보길 바란다. 메구로 할아버지가.’
작은 생명에 마음을 기울이라니. 자연을 이해하고 ‘과학을 즐기는 마음’을 키우라는 소망이 배어난다. 기생충관을 매일 같이 드나들며 무아지경으로 현미경을 들여다보던 아이가 연구자로 성장한 사례도 있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분명 기생충과 함께할 것이다.’ 그는 굳센 결의로 자서전을 마무리했다. 뜻은 계승되었고, 기생충관은 2023년에 70주년을 맞이했다.
2. 숲, 장작, 그리고 사람
피어라, 져라, 인간의 뜻대로
‘사쿠(핀다)’라는 동사에 밝은 울림을 가지는 접미어 ‘라’를 붙인 사쿠라(벚꽃), 일본의 국화(國花)이며 봄의 상징이다.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가련하지만, 활짝 피면 가지가 휠 정도로 현란하다. 푸른 하늘 아래 봄 안개 속에서 희미한 빛을 두르듯 피는 모습도, 미련 없이 떨어지는 모습도 좋은 정경이다.
100종류가 넘는다는 벚꽃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품종은 왕벚나무일 것이다. 에도 시대에 소메이 마을에서 태어난 원예 품종이다. 기르기 쉬운 데다가 어린나무에서도 꽃이 피기 때문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근래에 유전자 해석을 통해 조상이 에도히간자쿠라와 오시마자쿠라의 잡종인 것으로 특정되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의 왕벚나무가 거의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매우 한정적인 원종 집단에서 꺾꽂이를 반복해 퍼져 나갔다고 한다. 몇천 그루, 몇만 그루의 왕벚나무가 한꺼번에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는 것도 원래는 같은 개체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가지를 잘라서 땅에 심으면 뿌리를 내리고, 원래 나무와 같은 유전자를 가진 복제 개체로 성장한다. 생물학에서는 이것을 ‘클론’이라고 부른다. 동물에도 클론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일란성 쌍둥이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을 한 후 그 수정란이 우연히 2개로 분열되어 각각 개체로 성장하는 것이다. 같은 DNA를 나눈 쌍둥이는 각각 상대방의 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이 아닌 인위적으로 클론 동물을 만드는 기술은 20세기 후반에 확립되었다. 복제하고 싶은 개체의 세포에서 유전 정보(DNA)가 채워진 핵을 꺼내고 미수정란의 핵과 교환한다. 전기 자극을 계속 주어 분열하는 상태로 만든 후, 수양부모의 자궁에 넣어 기른다.
육질이 좋은 소가 있다고 하자. 그 형질을 수컷과 암컷이 만나 일반적인 방법으로 번식하려고 하면 일정 확률로 ‘꽝’이 나온다. 그러나 클론이라면 이론상 충실히 재현할 수 있다.
해외에는 반려동물과 이별하는 게 아쉬워 주인의 부탁으로 클론 개체를 만드는 사업도 있다고 한다. 클론 기술로 멸종 동물을 부활시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매머드 부활 프로젝트다. 여기서는 영구 동토에서 동결 상태로 발굴된 매머드의 체세포를 사용한다. 세포에서 핵을 꺼내 코끼리 난자의 핵과 바꾸고, 코끼리의 자궁으로 이식해서 출산하게 하는 것이다.
성공 사례는 아직 없다. 야심 찬 연구지만, 1만 년 전에 멸종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호기심만으로 부활시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오버슈트
2022년도에 세계 인구는 80억 명을 돌파했다. 국제 연합 인구 기금에 따르면 70억 명을 돌파한 것은 2010년이었다. 12년 동안 무려 10억 명이 늘어났다는 계산이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이래로 세계 인구의 증가 추세를 그린 그래프가 기금의 웹사이트에 실려 있다. 약 20만 년 전부터 변동이 없거나 완만한 증가 추세를 이어 온 인구 커브는 19세기경에 급상승했다. 마치 로켓 같다. 코로나바이러스 때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오버슈트(Overshoot; 도를 넘다)’ 현상과 비슷하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배경에 산업혁명과 그것을 만들어 낸 과학기술의 발전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기원전부터 시작됐다는 농경이나 목축은 기후 등 외부 조건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화학 비료가 발명되었고 농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졌다. 식량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림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의학 발전도 인구 증가에 한몫했을 것이다. 병의 구조가 밝혀졌으며, 종두나 항생 물질은 치명적인 감염증을 ‘막거나 고칠 수 있는 병’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인구는 근래 100년 만에 4배로 늘어난 것이다.
인류의 번영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많은 인구를 과연 지구가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생긴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구라는 시스템에는 한계가 있다. 한정된 자원을 모든 인류가 잘 나눠서 고갈되지 않도록 계속 쓸 수 있을까?
국제환경NGO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인류는 현재 지구가 1년 동안 공급할 수 있는 자원의 1.7배를 소비하고 있다고 한다. 1월 1일에 ‘준비, 시작!’ 하고 쓰기 시작해서 12월 31일에 정확히 다 쓴다면 간신히 합격이다. 하지만 1.7배의 페이스라는 것은 1년 동안 써야 할 자원을 7월 28일에 다 써버리는 꼴이 된다. NGO는 이 날짜를 ‘어스 오버슈트(earth overshoot)’라 이름 짓고, 각국의 상황에 맞춰 산출했다. 예상대로 산유국이나 선진국일수록 성적이 나쁘다. 2023년에 가장 빨리 ‘그날’이 온 나라는 카타르로 2월 10일, 미국은 3월 13일, 일본은 5월 6일이었다.
‘네? 매사에 뭐 하나 쓰는 것도 아까워하면서 살고 있는데요?”라며 반론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도, 전기도, 식품도 돈만 내면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삶 자체가 상당히 사치스러운 환경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만 한다.
보유한 자원이 많지 않다고 해서 수입 시 타국에 밀리지 않으려고 무조건 돈을 많이 벌자는 것은 단기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인구가 많이 늘어나는 저소득국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리고 결국엔 난민이나 분쟁이라는 형태로 평화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구는 하나다. 인류는 형제다. 그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3. 과학의 빛과 어둠을 살았던 학자
‘물의 행성’에 살다
인간의 사고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한다. 물이 절반 들어 있는 컵을 보고 ‘절반밖에 없네.’라며 한탄하는 사람과 ‘절반이나 있네.’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아프리카에서 의료 지원을 하는 가와하라 나오유키 씨는 ‘절반이나 있네’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가 이사장을 맡은 NPO 법인 ‘로시난테스’의 거점, 수단에 코로나가 닥치면서 예정했던 사업이 모조리 막혔다. 가와하라 씨와 관계자들은 현지 정부와 연계해서 감염 방지 대책 개발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 그런데 가와하라 씨가 일시 귀국해 일본에 있는 동안 긴급 사태가 발령되면서 수단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저는 의사지만 일손이 부족하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라며 동네 시청에 지원했다. 이후 그는 ‘기타큐슈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책 전문관’이 되어 후쿠오카현과 일을 조정하거나 고령자 시설의 감염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바삐 돌아다녔다. 그는 ‘곤경에 빠진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돕는다’가 인생의 신조다.
수단과의 인연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외무성 의무관으로서 현지 일본 대사관에 부임했을 당시, 수단은 다르푸르 분쟁을 이유로 선진국의 경제적 지원이 끊긴 상태였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이 일본인들만 진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래서야 눈앞에서 괴로워하는 현지인들은 도울 수가 없겠구나.’라며 생각을 바꿨다.
그는 1,700만 엔의 연봉과 직책을 반납하고, 2006년에 지원 단체를 만들었다. 이름은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비쩍 마른 말 ‘로시난테’에서 따와 ‘로시난테스’로 했다. 그는 의사가 없는 마을로 순회 진료를 다니기 시작했다. 촌락에서 제일 높은 어르신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차를 내주었다. 빗물처럼 탁한 물이 나올 때도 있었다. 꾹 참고 마셨다가 배탈이 난 적도 여러 번이다.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감염증에 걸린 사람들이었다. 물이 깨끗해야 병도 줄어든다는 걸 또 깨달았다. 그는 활동 목표에 ‘깨끗한 물 확보’를 추가했다.
‘물의 행성’이라 불리는 이 지구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담수는 전체의 0.01%밖에 없다.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30억 명이 손 씻는 설비가 없는 집에 산다고 한다. 5세 미만 아이들 30만 명이 매년 비위생 문제로 생기는 설사증 때문에 사망에 이른다.
수단에서도 인구의 약 절반이 청결한 물을 얻지 못한다. 물을 긷는 일은 아이들의 몫이다. 물통을 당나귀 등에 싣고 한 시간을 걸어서 저수지로 간다. 당나귀가 방뇨하는 동안 옆에서 물을 퍼올리고 그 물을 식수로 쓰는 것이다.
가와하라 씨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연못을 울타리로 에워싸고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돌이나 모래 필터로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1,000만 엔의 기부금을 얻어 공사 목표를 세웠다. 또한 어느 마을에서는 우물을 팠다. 태양 전지로 펌프를 가동해 물을 퍼 올리고, 주민들에게 관리를 맡겼다. 또한 ‘깨끗한 물’과 엮어서 교토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 깨끗한 물이라는 이름의 절)의 지원을 얻어냈다.
물을 긷는 일에서 해방된 아이들이 누구보다 기뻐했다. 어떤 소녀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우물의 완공식 사진 속에는 수줍어하는 소녀 옆에서 가와하라 씨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애국심이 독가스를 낳는다
‘화학 무기의 아버지’라 불린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의 생애를 자세히 알면 알수록 감당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패전국으로서 거액의 배상금을 떠안게 된 독일을 위해 하버는 바닷물에서 금을 추출하는 연금술 비슷한 연구도 진행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유대인 배척을 내세운 나치 독일이 대두하면서 그의 말년은 불우했다.
공기 중의 질소를 수소와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알아낸 일은 그가 인류를 위해 세운 가장 큰 공헌이다. 이것을 원료로 해서 만든 질소 비료는 농업의 생산성을 눈에 띄게 끌어올렸다. 그래서 하버는 ‘공기로 빵을 만든 사람’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평생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유대인이라는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에 재능이 있으면서도 차별 대우를 받은 이유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개신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그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화학 무기를 개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화확 무기 개발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전쟁은 장기전이 되고 말았다. 그가 비인도적인 무기를 만드는 일에 계속 반대하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그의 애국심과 재능을 국가는 최대한 이용했다. 그로 하여금 독가스 무기를 제조하게 한 것이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것을 최초로 사용한 나라가 되었다.
유대인 배척 정책으로 연구소장 자리에서 쫓겨날 때 하버는 칠판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22년 동안 평화 시에는 인류를 위해, 전시에는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온 연구소에 작별을 고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생전에 ‘인류를 위해’ 살충제로 개발한 치클론 B는 수용소에서 유대인 동포들을 학살하는 데 쓰였다.
우유 한 잔, 일상의 여유
손으로 쓴 메모 한 장이 책상 위에 남겨져 있다. 조목별로 쓴 비망록이다. 몇몇 항목에는 끝났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용건 중에 ‘작업용 점프슈트’라는 글자를 발견했을 때, 나는 깊은 상실감에 휩싸였다. 이 메모를 쓴 마에다 게이치로 도쿄대학교 교수는 2018년 2월 3일, 대동맥류 파열로 여행지에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도쿄대 농학부에서 공부하고 부속 목장에서 먹고 자면서 연구에 몰두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나고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동물의 생식 메커니즘을 연구했고, 가축 번식학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자타공인 ‘목장에서 자란’ 학자였다. 특히 자신의 연구 성과가 어떻게든 사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중 하나가 캄보디아에서 낙농·축산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캄보디아는 1970년대에 폴 포트 정권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희생당했고, 낙농을 포함한 산업이 황폐해졌다. 그러한 실태를 유학생에게 들은 마에다 씨는 ‘캄보디아 어린이들이 신선하고 맛있는 우유를 언제든지 마실 수 있도록 돕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유는 어린이들의 성장을 돕는 친숙한 영양 식품이다. 일본에서는 신종 코로나 때문에 전국적으로 휴교를 했을 때 급식용 우유가 대량으로 남아서 주목을 받았다. 그런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우유를 아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일상에 대해 깊이 생각할 일이 없다. 나도 마에다 씨에게 ‘우유 제조는 하이테크 산업’이라는 걸 배울 때까지 그랬다.
우유 제조가 ‘하이테크 산업’인 까닭은 소젖 짜기부터 살균, 냉장, 운반까지 모든 과정에 세심한 관리가 요구되고, 게다가 암소의 번식 사이클과 생산이 깊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암소의 젖은 원래 출산한 뒤 일정 동안만 나온다. 그러나 우유는 1년 내내 수요가 있다. 안정된 공급을 하려면 과학적 지식에 기인하여 확실한 임신과 안전한 출산, 그리고 건강한 사육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마에다 씨가 프로젝트를 시작한 2007년경, 캄보디아에서 우유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았다. 밀크 하면 보통은 캔에 들어가는 연유를 가리켰다. 나고야대학교와 캄보디아 왕립 농업대학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낙농 지도자 육성에 힘썼다. 유량이 많은 홀스타인과 현지의 소를 교배해서 더운 기후에 견딜 수 있는 젖소 육성에도 도전했다. 10년째가 됐을 때 마침내 착유기나 살균, 냉장 설비를 갖춘 작은 실습 시설이 현지의 왕립 농업대학에 완공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에다 씨는 자신의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도쿄대 부속 목장에서 새로 시작하게 될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책상 메모에 있었던 ‘작업용 점프슈트’는 학생을 지도할 때 입을 예정이었다.
아내인 쓰카무라 히로코 나고야대학교 교수는 “그분은 ‘농학은 평화의 학문이며, 식량이 풍족하면 전쟁은 사라진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라며 회상했다. 그 뜻은 남겨진 사람들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주인 없는 교수실, 마에다 씨의 책상은 2년 전부터 시간이 멈춰 있다. 일상의 소중함과 허무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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